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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칭 갓으로 불리는 흑립(黑笠)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백의(白衣)와 대비되어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신분을 상징하고 있다. 갓은 고려 시대에 서민들이 즐겨 쓰던 패랭이(平凉子)에서 유래되어 조선시대에는 한층 양식미를 갖춘 공예품으로 발전하였다. 우선 공예품의 형태가 대우와 양태를 한 땀에 완성시키는 패랭이에서, 대우와 양태를 분리 제작한 것을 하나로 결합하는 초립(草笠)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대우의 꼭대기가 평평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작도 기법으로는 겉대의 굵기를 실낱처럼 가늘게 만들어서 섬세하게 엮거나, 말총으로 결은 다음 먹칠과 옻칠을 가미하여 흑칠립(黑漆笠)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흑립은 의관의 정제를 중시했던 조선조 선비들이 평상시에도 항상 애용하였고 그들의 취향에 따라 갓의 대우가 높아지기도 낮아지기도 하였으며, 양태도 넓어지고 좁아지는 등 시대의 흐름 속에 양식적인 변천을 거듭하였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조선 갓의 형성과정으로서 앞 시기의 패랭이가 조선 초의 초립을 거쳐 갓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그리고 갓을 만드는 재료와 도구는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모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조선 갓의 양식적인 변호, 또 대우와 양태를 만들거나 그것을 모아서 조립하는 모자장과 양태장 및 입자장(笠子匠)의 소속 관청과 분포 및 처지의 변화를 밝혀 보도록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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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갓의 유래에 대하여 조선후기의 실학자 및 일제하의 최남선 등은 이미 패랭이와 연관시켜 생각하고 있었다. 이긍익(1736~1806년)은 연려실기술별집에서 갓에 영향을 준 패랭이는 이른 시기부터 우리나라의 서민들이 착용하였던 것으로서 대나무를 엮어서 만들었으며 그 형태는 간소하였다고 한다. 같은 내용이 이유원 임하필기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최남선 또한 조선상식에서 갓은 삿갓에서 비롯하여 패랭이·초립·전립 등 여러 층의 미화, 간화, 향토화를 거쳐 고려 이래로 점차 성립하고 조선에 들어와서 보편화된 것으로 보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조선 후기 이후 학자들은 갓은 형태와 기법 면에서 패랭이에서 비롯하였으며, 패랭이를 미적으로 개선하고 단순화시켜서 조선적인 갓으로 다듬어져 유행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고려시대 이래의 패랭이는 둥근 대우와 차양 부분이 분리되지 않은 채 만들어져 있으며, 하나의 대죽을 사용하여 대우부터 차양까지 엮으며 전체적으로 원나라의 발립과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패랭이에서 갓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그 형태나 제작기술 및 재료와 색상 등은 일치하지 않은 점이 많았다. 곧 조선 갓은 이러한 차이점을 미적으로 개선하고 기술적으로 개량하여 조선인의 미의식에 맞는 제품으로 완성한 창의적인 공예품이었던 것이다.
우선 패랭이는 대우의 꼭대기가 둥근대 비하여 갓은 평평하다. 패랭이의 이 둥근 꼭대기 모양은 초립을 만드는 단계에서 기술적으로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갓의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이러한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초립이 그 형태상의 변화와 재료, 색상 및 제작기술의 개량을 통하여 조선 갓의 전형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초립은 그것을 만드는 대올의 가늘고 굵기에 따라, 그리고 그 모양이 촘촘하거나 성근 정도에 따라, 국가가 착용하는 계층을 달리하도록 규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대올 수에 따라 50죽, 30죽, 20죽으로 구분하고 사용할 계층을 법제화하였다.
한편 조선 초기의 갓일과 관련되는 장인들은 이미 여러 장색으로 분화되어 경국대전에는 경공장과 외공장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어의용 공예품을 제작하는 곳은 상의원으로 이들 가운데 갓과 직접 관련되는 장색은 초립장, 유립장, 양태장, 모자장 등 네 가지 장색들로서 총 인원수는 37명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이른 시기부터 만들기 시작한 초립을 제작하는 장인은 25명으로서 가장 숫자가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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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들어서면서 갓의 형태는 조선 전기와는 달리 변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선조 대에는 임진왜란을 겪지만 별다른 변화 없이 대우는 높고 양태가 좁은 갓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광해군 대에는 대우는 낮고 양태가 큰 갓이 유행하였다. 현종 때에는 대우가 낮고 양태도 좁은 갓이 유행하여 앞 시대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후 효종 때 입제를 마련할 때 비변사에서 옛 제도를 정식으로 삼아 대우는 포백척으로 4치 5푼(13.5cm 정도)으로 정하고, 양태의 넓이 또한 마찬가지로 정하였다.
갓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유행이 변하였지만, 17세기 전반에는 왕이나 세자 혹은 세손이 착용하는 갓을 제작하는 장인은,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로 모자와 양태 그리고 갓을 모으는 장인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17세기 후반에는 17세기 전반보다 갓을 제작하는 장인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장색도 증가하였다. 17세기 후반의 도감에 차출된 갓 장인의 장색과 인원수를 간추려 보면 17세기 후반 47년간 31회의 도감이 개설되었으며, 갓일에 동원된 장색은 마미장, 양태장, 입자장, 사립장 등 4종류였다. 이때 동원된 연 총인원은 마미장 10명, 양태장 34명, 립장 42명, 사립장 117명이었고, 4장색의 연인원은 총 203명이었다. 립장과 사립장이 동시에 같은 도감에 차출되었던 1651년 현종의 가례도감을 보면 립장 오선일과 성말남은 가례도감 1방에 동원되었으며, 사립장 한어질동은 3방에 차출되고 있었다. 이처럼 립장과 사립장의 동원 비율이 대우와 양태를 제작하는 장인보다 도감에 동원되는 비율이 높은 만큼 작업상의 비중도 높았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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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사회 경제적인 발달에 수반하여 양반 지주층과 부상대고 등에 의한 갓의 수요가 확대되면서 갓의 상품화가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갓의 민간수공업이 발달하면서 ‘도감’과 왕실용의 갓을 제작할 때 마미장을 따로 차출하지 않았으며, 양태장도 일정한 수량을 민간에서 공급했기 때문에 그 수가 줄어들었다.
1700년대 전후에는 한 집안의 장인들이 갓일에 종사하기도 하였는데, 사립장 고씨(高氏) 집안이 대표적인 가문이었다. 1713년부터 1727년까지 도감에 차출된 사립장은 고흥익·고흥만·고태만·고성위·고인익 등이 있는데 이들 중 한 명 혹은 여럿이서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왕이 쓰는 갓은 사립장이 제작하였는데 그 갓을 왕이 쓰기 때문인지 면류관에 해당되는 두면(頭冕)이라고 불렀고 립장 또한 두면장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두면장으로 분류된 장인 중, 사립장 이수만과 윤세휘는 상의원과 내수사에 소속되어 있던 관장이었다. 그리고 두면장 손세만과 김세휘는 조선 후기 사립장 중, 가장 탁월한 솜씨를 갖춘 대표적인 장인들로서, 그들은 상의원과 공조의 관장이거나 때로는 사장으로 도감에 차출되었으며 18세기 상의원 소속의 사립장들에 비해 특별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갓은 수요자가 밀집해 있는 도성 근처나 교통의 요충지에서 발달을 하였다. 18세기의 안성은 경기와 호남, 호서 지방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서 각종 물자들이 모여들고 수공업자들과 상인들이 모여드는 한강 이남의 큰 도회지였다. 안성 지역에서 말총수공업이 발전하게 된 것은 제주도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던 반제품인 제량을 구입하여 완제품의 갓을 생산하면서부터이다. 이렇게 말총을 이용한 수공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점촌은 18세기 이후 눈에 띄게 늘어나게 되었는데, 이는 그만큼 말총으로 만든 관모의 수요가 증가하여 말총수공업자와 상인들 사이에서 상품거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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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는 민간 수공업에 의해 제작되는 갓을 구매할 수 있게 되어 왕실이나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갓을 제작하기 위해 도감에 동원되는 장인의 숫자가 크게 격감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에 19세기에 갓을 만들기 위해 각종 도감에 불러 들였던 갓 제작장인을 열거하면 다음의 같다. 19세기 초에는 김종혁과 박운성과 김상희 등 3명의 사립장이 20여 년간 여러 도감에 차출되어 뚜렷한 계보를 형성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김종혁은 1802년부터 1821년까지 19년간 동원되었다. 박운성은 1800년부터 1819년까지 19년간 활동하였으며, 김상희는 1802년부터 1821년까지 19년간 도감에 차출되었다. 하지만 1820년 이후에는 사립장 한 명이 여러 도감에 참여하는 빈도가 줄어들어서 사립장 한 명이 한두 도감에 참여할 뿐 몇 차례씩 반복적으로 동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뚜렷한 활동을 보인 사립장을 찾기 어려웠고 계보도 형성되지 않았다.
한편 양태와 죽모자의 재료가 되는 제주산 양죽은 "임술제주민란"의 원인이 되었을 정도로 제주도에서 중요한 산물이었다. 1826년(철종 13) 3월에 한양에 사는 고판관(高判官)이 제주도의 특산인 양죽을 베어갈 수 있도록 편의를 봐 달라는 공문을 가지고 제주도로 왔다. 그는 사람을 보내 함부로 양죽을 베어냈다. 당시 양죽으로 양태를 겯는 일은 제주 여인들의 생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양죽 약탈에 대해 제주민들이 저항하기에 이르렀다. 김흥채는 제주목 동헌에서 무자비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같은 해 9월부터 11월까지 세 차례에 걸친 항쟁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봉기의 결과 이듬해 1863년(철종 14) 2월 2일 새로 부임한 정기원 목사는 김흥채 등을 효수하였다. 안핵사 이건필은 그해 2월 4일에 출발하여 약 4개월간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 다음 6월 2일 귀경하였다. 이 때 18항을 건의하였는데, 그 첫 번째 항목이 제주민에게 손해를 끼치는 물물교역소인 통영 김제의 양태를 일체 금할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제주도가 양태를 제작할 수 있는 양죽의 명산지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말기에 이르자 양반의 숫자가 증가하고 반상의 구별 없이 갓의 착용이 보편화되면서 장인의 숫자가 늘어나 각지의 특산품으로서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이렇게 전 백성이 애용하던 갓이 쇠퇴하게 된 계기는 을미사변이 있던 이듬해에 미국을 견문하고 돌아온 유길준 등이 발의한 단발령에 기인한다.
일제시대에는 기술자에 대한 관의 가혹한 수탈과 사회적으로 낮은 대우 때문에 기술 발전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주도는 일제시대에도 여전히 많은 수익을 올렸다. 1927년에 조선 각지에서 출토되는 특산품을 조사할 때 제주도에서 각 호에서 제작하는 갓이나 양태 등의 연간 생산량과 수입을 조사한 것을 다음과 같이 (표1)로 만들어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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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종사호수 |
1년간 생산량 |
비고 |
수량 |
생산액 |
입자 |
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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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본토로 판매됨 |
양태 |
13,700 |
330 |
163,500 |
상동 |
탕건 |
128 |
13,700 |
405,000 |
상동 |
망건 |
812 |
812 |
15,810 |
상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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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927년 제주도의 관모 생산 |
이후에도 제주도에서는 비록 그 수량은 조금 줄었지만, 관모 공예품을 제작하여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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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은 말총과 대나무와 명주실이나 명주천, 그리고 한지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소재미의 극치이고, 바늘이나 인두처럼 간단한 도구로 탄생시킨 구조미의 정수이다. 이와 같은 재료와 도구로 갓을 만들려면 총모자장과 양태장과 입자장의 솜씨가 한껏 발휘되어야 가능하다.
갓은 원래 대우와 양태를 모두 대나무로 제작하는 죽세공예의 일종이었으나, 이후 대우 부분만 말총으로 대체되면서 갓은 마미공예와 죽세 공예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따라서 갓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각종 재료와 도구를 살펴보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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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총모자장이 사용한 도구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간단하였다. 대우를 짜는 것은 아니지만 기산풍속도첩의 관 짜는 모양을 보면 방관을 만들기 위해 오른쪽의 장인이 베틀에서 포의 형태를 짜면, 왼쪽의 장인이 네모진 관골을 주개판에 걸고 네모난 관을 짜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 총모자장의 기본 도구는 관 짜는 장인과 마찬가지로 모자골과 주개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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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총과 쇠꼬리털
갓의 대우 부분에 사용되는 재료는 말총이나 쇠꼬리털이다. 현재 김인 보유자가 가지고 있는 말총은 대체로 검은색이고 길이는 86cm정도였다. 이에 비해 쇠꼬리털은 비교적 흰색 등 밝은 색이 많으며 40cm 정도로서 길이가 짧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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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골(총모자골, 육지-모잡골)
전체적인 형태는 아래가 넓고 위는 사다리꼴처럼 줄어드는 변형 원통의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 일골의 표면에는 어교가 묻어 있는데 특히 모자의 꼭대기의 천박이라고 제주도 사투리로 부르는 부분에는 어교가 두껍게 발라져 있다. 이 천박부분의 어교는 말총으로 연결하여 모자의 시작 부분에 해당되는 생이방석을 만든 다음 결어갈 때 불에 녹여서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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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골걸이(주개판)
총모자를 결을 때 주개판 위에 일골을 올려서 돌려가면서 짤 수 있도록 만들어져서 판의 꼭대기는 둥글게 굴려져 있다.
주개판 위에 일골을 걸었을 때 일골 안쪽에 패인 홈이 주개판 위에서 빙빙 도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양자 사이의 빈 공간에는 헌 헝겊을 넣어 메꾸는 역할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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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총바늘(바농대; 쇠끌)
철제를 두들겨 만든 바늘대의 길이는 15cm정도이다. 바늘 끝은 갈고리처럼 가늘고 약간 휘었으며, 바늘귀 부분은 직경이 1.5cm로 둥글면서도 넓적하다. 바늘 끝에서 5cm 부분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잡을 때 미끄러지지 않도록 가는 면사를 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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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먹골과 석죽
먹골에 대우를 꽉 끼우고 삶아서 먹칠하기 위해 넣는 빳빳한 종이를 석죽이라 한다. 석죽용 종이는 두꺼운 도화지나 하드보드지 계통이며, 주로 쓰고 나서 버리는 종이를 재활용하기 때문에 아끼고 절약하는 제주여인의 삶의 예지가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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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먹사발과 먹솔
먹사발은 먹물을 담아두는 도자제 그릇이고, 먹솔은 말총과 같이 뻣뻣한 털의 중간 부분을 묶어서 사용한다. 총모자를 만드는 재료인 말총과 쇠꼬리털은 그 색상이 검은색이나 흰색을 비롯해 다양하므로 총모자 위에 짙은 먹을 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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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장은 양태를 엮는 기술 이전에 양태의 재료로 사용하는 대나무와 친숙하여 대나무를 잘 다루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양태장은 대나무의 성질을 잘 알고 좋은 대를 고르는 눈썰미와 대를 가르고 쪼개고 훑고 다듬어서 대오리(죽사)를 만드는 솜씨를 갖추어야 한다.
현대 제주의 양태장은 잠자리 날개처럼 고운 양태를 제작하기 위해 가는 죽사를 만들거나, 양태판이와 텅에를 비롯하여 갖춰야 할 각종 도구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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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나무(분죽, 粉竹)
양태는 가는 대나무를 사용하여 짠다. 양태를 만들기 위한 대나무는 마디 사이가 두 뼘(40cm 내외) 이상에 해당되는 분죽(粉竹)을 서리가 내린 뒤 음력 9~10월경에 채취한 것을 그 재료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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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릎짱(무럽장; 육지-훑가죽)
댓개비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훑을 때 양 무릎에 끼워서 사용한다. 피혁과 헝겊으로 만들며 대를 훑을 때 양 무릎에 ∞형태로 받치는 넓적한 쇠가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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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칼(竹刀)과 숫돌
대나무로 만들며 대를 나릴 때 대고 문지르는 것이다. 보통 모양은 식칼과 흡사하여 칼 부분은 길이 14.5cm에 폭 4cm이고 손잡이는 11cm이다. 대칼은 식칼에 비해 칼날이 넓적하고 칼날 끝은 뭉툭한 편이다. 대칼의 칼날이 무뎌지면 숫돌 위에 올려놓고 갈아서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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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받훔
겉목한 대를 재기거나 내릴 때 대칼을 고정시켜 세워놓는 받침대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주개판이나 골걸이와 흡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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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빗대클(빗대칼; 육지-조름대)
주개판 형태 위ㅉ고에 칼날조각을 꽂아서 빗대살을 훑는 것이다. 가로와 세로가 20.5cm인 넓적한 나무판 위에 수직으로 30.8cm의 나무막대를 꽂아서 "ㅗ"자 형태로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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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양태판이(판이; 육지-양판)
양태를 절이는 둥근 원형의 판으로 벚나무나 느티나무의 판목으로 만든다. 가끔 반원을 잘라서 양쪽을 이어 붙여서 원형으로 만들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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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텅에구덕(판걸이)
제주도에서 대나무를 엮어 만드는 구덕의 제작법을 응용하여, 양태판이를 받치거나 양태용 도구를 넣어두는 수납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높이는 25.5cm이고 양태판이를 올려놓는 위쪽의 입지름은 37c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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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머럭쇠(머럭홈뜸)
머럭용 대나무를 일정한 굵기로 훑을 때 사용하는 납 조각에 좁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다. 납조각의 크기는 가로 4.5cm, 세로 4cm 정도이고, 그 안쪽에 1mm 내외의 구멍이 촘촘히 뚫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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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지들쇠(무수기, 무쇠제역, 육지-고무쇠)
양태판이 위에 쌀 날을 올려놓고 절어갈 때 쌀 날이 위로 솟는 것을 막기 위해 눌러놓는 쇳조각을 가리킨다. 크기와 모양은 일정하지 않고 쌀 날을 짓누를 수 있을 정도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 정도의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활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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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고칫대
대나무를 길이 17.5cm, 폭 1.2cm의 크기로 납작하게 만든 댓개비이다. 빗대를 꽂을 때 사용하며, 육지에서는 베름(절음)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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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바농대
철제로 만들며 길이 17.5cm 정도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총모자장이 사용하는 바농대와 유사하며 날줄 사이로 절임줄을 넣을 때 주로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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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쌀엮음실
무명실을 사용하여 양태의 날줄에 해당되는 쌀을 엮을 때 두 가닥을 서로 교차하면서 엮어갈 때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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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머럭
쌀대와 절임줄 사이의 칸을 띄우며 태극선을 그어 빗대를 끼우도록 끝이 갈라져 있는 대오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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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대사발
총모자장이 말총을 담가 두어 신축성을 살리듯이, 양태장은 대나무에 물을 적실 때 사용하는 사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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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입자장은 화로와 버랑을 중심으로 빙 둘러 앉아 골배기를 위해 주개판과 모자골과 마늘, 대일을 위해 댓개비와 주개판과 대칼 등, 버랑일을 위해 양판궤와 양판 및 인두 및 사발 등을 마련하였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통영과 예천의 입자장 또한 갓을 조립하고 완성하기 위해서 골배기, 대일, 수장일과 트집잡기 등 작업마다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재료와 도구는 조선시대와 대체로 비슷하나 약간 차이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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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나무
입자장은 통대나무를 가르고 쪼개며 피죽과 속대로 갈라서 물에 불려 놓았다가 왼손가락에 가죽골무를 끼고 물에 불린 겉대와 속대를 집어서 훑가죽을 댄 무릎 위에 대고 훑은 다음 삶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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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촉사(蜀絲)
촉사는 중국 삼국의 촉나라였던 사천성에서 생산된 최고급의 천연 누에 고치실이다. 광무 이전 시기까지는 중국에서 수입하여 최상품의 갓을 만들 때에 사용된 재료였는데, 현재는 명주실로 촉사를 대용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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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생초(生綃)
포립을 제작할 때 사용하는 옷감으로서 대나무로 만든 양태 위에 올리기 때문에 등포(騰布)라고도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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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창호지(窓戶紙)
대우의 안쪽 가운데에 붙이는 정꽃이나 대우와 양태의 사이에 붙이는 뒤새를 만들 때 사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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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교(魚膠; fish glue)
최상품의 접착제이다. 민어(民魚, croaker)와 부레(air bladder)를 피지방질만 제거하여 쌀뜨물에 담갔다가 말린 것은 물을 붓고 끓여서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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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먹과 옻
먹과 옻은 갓을 검게 만드는 일종의 도료이다. 먹은 먹통이나 대형 벼루에 진하게 갈아서 쓴다. 옻은 색상을 보완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지만 방습과 방부 및 방충 등에 탁월한 효과가 있기 때문에,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에도 갓을 쓸 수 있으며 오랫동안 보관할 때에도 유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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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갓끈
갓끈은 갓을 매거나 장식하기 위해 사용하며, 재료에 의해 목령, 죽령, 오죽령, 산호령, 밀화령, 수정령, 상아령, 호박령, 대모령 및 포령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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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비넷대(들대)
대나무로 만들며, 끝부분이 날렵하여 골에서 모자나 은각을 분리할 때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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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가락꽂이
철제로 만들며 일종의 송곳이다. 갓의 은각 부분에 구멍을 뚫기 위해 끝은 뾰족하고 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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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총바늘
골걸이에 골딩이를 올려놓고 골배기를 할 때 사용하는 바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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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대칼과 숫돌
칼은 철제로, 자루는 나무로 만들며 양태장과 마찬가지로 대일을 할 때 사용한다. 대칼은 통대나무를 쪼개거나 대오리를 훑거나 대를 내리거나 죽일 때 사용하며, 칼날이 무뎌지면 숫돌에 갈아서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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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쌈지골(골딩이)
느티나무로 주로 만들며, 전체적으로 아래는 넓고 위는 좁은 사다리꼴을 이루는 원통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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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석주판(골자루와 골자루판; 주베기와 주베기판)
쌈지골을 비롯한 각종 골을 비스듬히 걸어서 골배기를 하거나 은각을 지을 때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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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양판(갓판)과 양판대
양판은 원목을 사용하여 도너츠처럼 안쪽을 뻥 뚫어서 만든 원형의 목제판이며, 아래쪽의 양판대에 올려놓고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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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애삐대와 속새
애삐대는 모서리에 상어 혓바닥을 납작한 나무에 붙인 것이다. 갓의 표면을 매끈하게 문지르는 것을 "상사질"이라 하며, 현대에는 사포질로 바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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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화로와 버랑
갓일 모으는 작업을 흔히 "버랑일"이라고 하며, 갓방의 갓 장인들은 화로를 중심으로 너댓명이 모여 함께 작업을 한다. 화로는 철제와 토기로 만들며 숯불을 담아 불을 피우고 그 위에 풀통의 어교를 녹이거나 인두를 알맞게 달군다. 버랑은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서 둥근 형태로 만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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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인두(대인두와 소인두)
인두는 철제이며 자루는 목제로 만든다. 갓일은 수장일을 하거나 버랑일을 할 때 입자장의 손에 항상 인두를 들고 인두의 온도와 속도와 기울기의 각도를 조절하여 완성시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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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귀얄(풀귀얄, 먹귀얄, 칠귀얄)
뻣뻣한 느낌의 돼지털로 만든다. 어교를 칠하는 붓은 풀귀얄, 먹칠을 할 때 사용하는 붓은 먹귀얄, 옻칠을 할 때 사용하면 칠귀얄이라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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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먹통과 어교풀통(풀벨리)
먹통은 석제로 만든 연적의 일종으로서 큰 벼루이다. 어교를 담아서 화로 위에서 풀을 끓이는 그릇으로 철제나 도기로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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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옻통, 칠장과 칠판
옻칠 그릇은 도자기로 만들며, 옻통은 옻칠이 끝난 갓을 넣어 옻칠이 완벽하게 마르도록 넣어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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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갓집
완성된 갓을 보관하는 함이나 상자로서, 신분이나 계층에 따라 재료와 형태와 크기가 각각 다르다. 갓집을 만든 재료는 가죽과 종이, 나무 등으로 아주 튼튼하게 만들었으며 그 형태는 원형, 6각형, 8각형 등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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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은 생산지와 재료와 색상에 따라 종류가 있다. 통영에서 만드는 '통양'과 제주에서 만드는 '제량'으로 구분되며 말총으로 만든 총모자와 대나무로 만든 죽모자 그리고 양태 위를 덧씌울 때 명주실을 사용하면 '진사립', 대살을 쓰면 '죽사립', 명주천을 입히면 '포립' 등 다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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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산지에 의한 분류
양태는 대나무 집산지에 위치한 통영에서 제작되면 '통양'이라고 불렀고, 제주에서 생산되면 '제량'이라고 불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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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료에 의한 분류
갓의 재료에 의해 종류를 나눌 수 있었는데, 크게 대우를 만든 재료와 양태 위를 덧씌운 재료에 의해 구분되었다. 대우의 재료로서 말총을 사용하여 제작하면 총대우라 부르고 죽사를 사용하면 죽대우라 불렀다. 대우와 양태 위에 명주실을 덧입히면 진사립, 죽사를 덧씌우면 죽사립, 명주천을 붙이면 포립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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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색상에 의한 분류
갓은 제작 과정마다 수십 회에 걸쳐 먹칠을 하였고, 완성된 다음에는 옻칠을 하여 마감을 하였다. 때문에 갓은 통칭 흑립이라 하고 혹은 흑칠립(黑漆笠)이라 한다.
한편 백립(白笠)은 임금이 돌아가셔서 치르는 국상 중에 사용하는 흰색의 갓으로서, 일반적으로는 포립으로 제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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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용도와 장식에 의한 분류
갓은 양반들이 바지, 저고리를 입고 도포로 의복의 갖춤 새를 마련한 후 편복 위에 쓰던 관모이다.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공적인 업무를 보러 등청을 할 때에는 단령의 공복 위에 사모관대를 착용하였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사적인 때에는 집안에서 탕건이나 방건 혹은 유건 등의 모자를 착용하였듯이, 외출할 때마다 의관을 정제할 목적으로 반드시 갓을 착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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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모장이 머리카락보다 가는 말총을 사용해서 총모자를 겯는 일은 총모자골, 일골받침, 작은 쇠갈고리처럼 생긴 바늘로 정교하게 엮는 극세공이다. 골거리에 모자골을 걸고 그 정상 면에 말총 여덟 줄을 꼬아서 열여섯 가닥이 되게 겹쳐서 한 묶음으로 하여 4묶음을 정자형으로 엮어 붙인다. 이것을 생이방석이라 하고 그 늘어진 줄을 날줄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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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이방석 엮기
날줄로 사용하는 말총 여덟 줄을 반으로 접은 열여섯 가닥이 한 묶음이다. 한 묶음을 네 손가락에 걸고 잡아당긴다.
4방향으로 겹치면서 井자 형태로 엮으며, 날줄은 16줄씩 4방향으로 엮어서 총 64줄을 사용하도록 단단하게 조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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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박(육지-운기) 뜨기
천박을 짤 때에는 골거리 위에 걸어둔 일골이 흔들리지 않게 하도록 허드레 옷감을 넣어서 고정시킨다. 일골 위 정면에 어교칠을 하여 말려두면 접착성이 생겨서 풀칠이 필요할 때 침을 발라준다. 날줄의 사잇줄을 넣기 전에 생이방석을 고착시키고자 할 때 성냥불을 피워 어교를 녹여서 접착시켜서 고정시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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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몸줄 뜨기
모자의 측면부에 해당되는 도리를 '몸줄'이라 부르는데, 몸줄을 짜 내려가기 전에 4번째 해당되는 '늬칭'이라 부르는 사잇줄을 추가하기 시작한다. 먼저 끼운 384줄에 3줄마다 1가닥씩 추가하여 결국 384줄에 128줄을 추가한 512줄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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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몸줄 떼기
몸줄 부분에서는 절임줄을 나선형으로 짜 내려가는데 4도리마다 한데 모으면서 짠다. 4도리씩 모아서 짜면 몇 줄을 짰는지 세기가 쉽고 마무리를 하거나 골배기를 할 때 줄을 떼면서 각 도리의 간격을 고르게 만들 때도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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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먹칠하기
총모자는 먹골에 끼운 채 골이 잠길 정도로 물이 담긴 솥에 넣고 여러 개를 한꺼번에 넣고 센 불에서 30분 정도 삶아서 형태를 고정시킨다. 총모자가 삶아지면 솥에서 꺼내, 바람이 잘 통하는 서늘한 그늘에 말린다. 다 마른 총모자에 짙은 먹을 갈아 먹사지에 묻혀 먹칠을 하면 총모자가 완성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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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양태장과 현대의 양태장은 거의 비슷한 재료와 도구로 양태를 제작하였다. 19세기 말 김준근의『기산풍속도첩』중에 그려진 <냥태 틀고>라는 그림을 보면 조선의 양태장은 여자가 많았음을 반증해준다. 양태청에 모인 두 여인네의 좌우에는 국수가닥보다 더 가느다란 죽사가 놓여 있고, 그녀들은 둥지다리라는 양태걸이 위에 둥근 양판을 걸고 가늘고 긴 대올을 한 올 한 올 결어서 둥근 양태를 짜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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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속튼대 만들기
대통은 대칼로 우선 반으로 쪼갠 후 다시 8-10여 조각 정도로 쪼갠 대를 가른다. 대칼을 써서 폭 1cm 정도로 쪼갠다. 쪼갠 댓개비의 단위는 '촉'이라고 부른다. 촉 단위의 댓개비를 대칼로서 세쪽을 내는데 이 과정은 '바순다'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꽃대칼로 칼금을 낸 다음 입으로 속살쪽 끝을 물고 한손으로 껍질부분을 당겨 나눠 놓는다. 이 과정을 '마침대를 속튼다'라고 하고 대오리를 쓰는 부분은 외피쪽(피죽) 부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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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겉목하기
양태로 사용할 만큼의 분량을 꺼낸 속튼대는 피죽의 두께가 최대한 얇아지도록 하나하나 안쪽을 다시 한 번 긁어낸다. 대나무를 긁어서 도화지 두께로 얇게 다듬는 이 작업을 제주 사투리로는 걸목 작업이라고 부르는 '겉목하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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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오리(죽사) 제작과정
죽도로 나린 대를 대오리(죽사)라고 하는데 그것을 용도에 따라 빗대클에 넣고 훑어서 가늘기를 조절하여 날대, 빗대, 졸을대를 만든다. 빗대클의 구멍에 넣고 2-3번 훑어 말총 정도의 가늘기로 다듬어서 날대(살대)를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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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쌀 엮음
"쌀 엮음"이란 제주 사투리로 살을 되게 발음한 것이다. 대나무 살을 날대로 삼기 위해 면사로 고정시키고 양태로 결을 수 있도록 묶어 두는 기초 작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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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를대 넣어 엮기
조를대로 엮어 가는 숫자는 양태의 품질을 결정한다. 양태 중 상품은 98도리 이상을 짠 것이고, 95도리 이하로 오면 차츰 질이 나빠져서 60도리는 좋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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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빗대 꽂기
빗대는 날줄과 조를대가 이루는 사각형의 대각선을 연결하면서 비스듬히 끼우는 작업으로서 전체적으로 태극선 모양을 이루며, 비스듬한 타원을 이루기 때문에 이를 '꽂는다'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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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어교칠하기
다 완성된 양태는 어교칠을 하여 마무리한다. 예전에는 이와 같은 양태의 마무리 작업은 중간 상인들이 하였으나, 요즘은 상인이 없기 때문에 양태장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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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을 만드는 일은 총모자장이 총모자를 미리 만들어 갖추고 양태장이 양태를 만든 것을 준비해 두더라도, 막상 갓방에서는 너댓 명이 일을 나누어 함께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1970년대에 통영의 김봉주 갓방에서는 조선시대처럼 여러 장인이 모여서 갓을 만들었지만 요즘은 한 명의 입자장이 이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해야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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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골배기
골배기는 총모자의 올과 간격을 고르고 반듯하게 하는 작업이다. 음양사립과 같이 총모자를 사용하여 갓을 제작할 경우에는 총모자를 고르는 작업을 제일 먼저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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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장하기
수장사기는 골배기가 끝난 대우를 양태 위에 못박기를 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일이다. 수장을 할 때 대우 위에 명주실을 입히면 진사립이고, 죽사를 입히면 죽사립이며, 명주천을 입히면 포립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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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테 만들기
정테는 대나무를 자르고 쪼갠 대올을 모자 사이즈에 맞춰 잘라서 어교칠을 하고 인두로 지져 붙인 다음 먹칠로 마감하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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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맥이(천개) 직조하기
정맥이(천개)짓기는 골딩이 위에서 가는 대올을 날줄과 씨줄로 삼아서 붙인 다음 완성된 정맥이를 총모자의 안쪽에 대고 어교칠을 해서 풀을 묻힌 다음, 어느 정도 마르고 나면 인두로 지져서 정맥이를 붙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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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꽃 오려 붙이기
흰 창호지의 한 면에 먹칠을 하고 화로에 말린 후 여러 번 접어서 뾰족하게 만들어 완성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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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은각 짓기
은각은 대우와 양태를 붙일 때에는 땀대의 역할을 하는 대올을 붙여서 마감하기 위해 만든다. 은각은 대우와 양태를 모아 갓으로 합치기 위해 대우와 양태가 합쳐지는 대우 부분에 편자대를 붙이고 X형태의 격자 모양으로 은각선을 붙이는 것인데, 입자장이 평소에 미리미리 만들어 두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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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버랑일; 트집잡기
버랑일은 입자장이 하는 일을 총칭하여 부르며, 이 일을 '트집 잡는다'고 하는데, 입자장이 익혀야 할 기술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중요한 기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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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등사하기
먼저, 명주실을 붙이는 방법은 철대 부분의 합장 위에 명주실 끝을 인두로 지져 붙이고 지밑의 합장 부분에 나머지 끝을 올려서 인두로 지져 붙인다. 다음으로는 대칼로 양태 표면의 톱밥 등을 긁어서 제거한 다음, 현대의 샌드 페퍼로 갈아내듯이 상어의 혓바닥으로 만든 속새로 양태 전체를 훑어 매끈한 표면으로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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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모자박기
양태와 모자를 끼워서 사이즈를 잰 다음 양태 지밑에 침을 바른다. 이때 비넷대를 끼워서 양태 전체를 잰다. 접착제로 붙이고 인두로 지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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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칠하기
먹칠은 검은색이 되도록 칠하는 것으로서 제작 도중에 부분마다 칠하지만 마지막으로 갓을 다 모아서 전체에 한 번 더 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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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은 조선시대부터 각종 공예품을 만들던 공방이 많았으며, 특히 갓을 비롯한 갓방과 장인이 많았던 곳이었다. 여기서는 예천 갓의 전통을 계승한 박창영 보유자를 중심으로 죽사립과 포립을 제작하는 과정을 실연하도록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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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 작업
먼저, 철대와 지밑대의 경우 알맞은 길이와 크기의 대나무를 골라서 쪼개고 갈라서 만든다. 다음으로는 천개나 은각 등의 짓기에 사용하기 위한 대올을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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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골배기
갓방에는 항상 총모자장에게 구입한 총모자가 수십 개가 준비되어 있는데, 골배기는 일을 할 때에는 이 총모자를 수장골에 박고 끝이 갈고리형으로 꼬부라진 쇠바늘의 끝으로 고르는 일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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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은각 짓기
바닥에 편자대를 먼저 붙이고 직각으로 비넷대를 붙여 인두로 지져서 붙인다. 다음으로 은각은 대를 나선형으로 돌린 후 사선형을 겹쳐 X형으로 붙이고 비넷대를 머리에 문지른 다음 은각골에 넣어 은각을 떼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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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천개 짓기
거철대는 입에서 손으로 어교칠해서 말린 것을 판대기 위에 놓고 인두로 지지며 끊어서 4각형의 외곽을 만든다. 안쪽 또한 인두로 지져가며 일렬로 붙여나간다. 그 뒤 십자형이 되도록 붙인다. 다 붙인 후 어교칠을 하고 비넷대로 빼 놓는다. 마지막으로 막힌 구멍을 뚫기 위하여 숨을 뿜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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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장하기
우선, 안못테 위에 천개를 올려 놓고 인두로 지진 후 천개에 먹칠을 하고 천개에 어교칠을 한 다음 인두로 지져 붙인다. 다 붙인 후에는 먹칠을 하고 어교칠을 하고 총 모자 위 꼭대기에 十자형 사죽을 놓는다. 그 뒤 천개를 명주천으로 싸고 인두로 지지고 총모자 명주천으로 붙인 후 여분을 오린다. 마지막으로 수장이 끝난 총모자를 버랑 위에서 말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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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꽃 만들기
한지의 한면에 먹을 칠한 다음 정꽃을 오려서 총모자의 안쪽에 붙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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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트집잡기
양태의 가장자리를 깔끔하게 가위로 오린다. 그 다음 양태에 먹칠을 하고 넓적한 인두로 둥실하게 휜다. 트집이 끝난 다음, 준비해둔 철대를 둥글게 휘고자 인두로 지진다. 마지막으로 양태에 지밑대를 인두로 붙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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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눌리합장
오린 창호지를 지밑에 빙 둘러 인두로 지져 붙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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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등사하기
양태 전체에 명주천을 둘러씌운 다음 인두로 지져서 구멍을 낸 다음 천을 붙인 양태 위에 먹칠한다. 모자 위에 가는 죽사를 한 올씩 붙여서 죽모자를 만들면 양태 위에 얇은 대올을 철대부분부터 지밑 부분까지 인두로 붙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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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눌리합장으로 거철대 붙이기
철대의 끝부분을 돌리며 인두로 붙인다. 끝 부분은 칼날로 약간씩 날리고 어교칠을 하고 눌리합장으로 둥실하게 붙인다. 버랑에 양태를 뒤집고 나면 철대 끝 부분을 칼로 날린 다음, 안쪽에 칼끝으로 철대의 끝부분을 칼로 날리고 전체를 상사질 한다. 상사질을 하여 매끈하게 만든 다음, 먹을 갈아 먹칠을 골고루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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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갓 모으기(못 박기)
모자와 양태를 끼우고 모자 높이를 비넷대로 잰다. 다음으로 미리 만들어 둔 은각을 지밑의 크기에 맞게 오리고 은각에 어교칠을 하여 모자에 붙인 다음 인두로 지져 붙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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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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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사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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